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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의 사회학: 정주영 자서전에 대한 사회학적 독해
 
Socio-logi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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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7-04-12 23:17:37

"이것은 자서전이 아니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자신의 생애를 성찰적으로 분석한 『자기 분석에 대한 초고』에서 그렇게 선언했다. 부르디외의 말처럼, 자서전은 객관적 지식을 추구하는 사회학의 이념과 쉽게 부합하기 어렵다. 자서전은 개인이 자기 유리한대로 재구성한 사적인 역사이며, 어떻게 봐도 객관적인 서술이 아니다. 그러나 반대로 이런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혹시 자서전이 가진 주관성과 편파적인 측면을 미리 간파하고, 이를 역이용해서 설득력 있는 지식을 생산할 수 있지는 않을까?" 이 글에서 소개하는 김홍중과 왕혜숙의 두 논문은 그런 화두를 품고 '무모한 도전'을 감행한다. - 운영진


김홍중. (2015). 파우스트 콤플렉스: 아산 정주영을 통해 본 한국 자본주의의 마음. 사회사상과 문화, 18(2), 237-285.
왕혜숙. (2016). 사회적 공연으로서의 자서전 읽기: 정주영 자서전에 나타난 기업인 정체성과 인정투쟁을 중심으로. 한국사회학, 50(5), 41-78. 




자서전의 사회학: 정주영 자서전에 대한 사회학적 독해


사회학과 자서전. 언뜻 봐서는 결코 친하다고 보기 힘든 두 단어의 조합이다. 일반적으로 사회학은 수학적•통계적 분석이나 잘 구성된 인터뷰처럼 학문적으로 객관적인 가치를 지향하는 1차 자료, 혹은 이를 바탕으로 출판된 2차 문헌을 연구대상으로 삼는다. 물론 질적방법론의 최전선에는 연구자 자신의 이야기를 준거로 하여 연구하는 ‘자기기술지 연구방법’(autobiographical method)이 있다고 하지만, 결코 흔하지 않다. 실제 연구에서 연구자들이 참고할 수 있는 자서전적 연구는 엄격하게 제한된다. 가령 학문 장에서 성공을 거둔 위인들(알튀세르나 부르디외)의 자기 고백적 저작들은 그들의 학문세계를 연구하는 문헌학적 연구에 중요하게 인용된다. 하지만 이는 예외적인 경우이고, 자서전은 사회(과)학의 연구대상이 되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이유는 간단한데, 자서전은 객관적인 사실이 아닐 뿐 아니라 자신의 삶을 사후적으로 정당화하려는 강한 이해관심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소개하는 두 논문은 자서전, 그것도 가장 유명한 재벌의 이야기를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김홍중의 논문 「파우스트 콤플렉스: 아산 정주영을 통해 본 한국 자본주의의 마음」, 그리고 왕혜숙의 논문 「사회적 공연으로서의 자서전 읽기: 정주영 자서전에 나타난 기업인 정체성과 인정투쟁을 중심으로」는 현대 그룹의 창업자였던 정주영의 자서전을 분석하고 사회학적인 의미를 끌어내려 한다. 두 논문 모두 정주영의 자서전을 바탕으로 서술되었기 때문에 똑같은 난점에 직면한다. 김홍중이 밝히듯 정주영의 여러 자서전은 결코 노년에 접어든 한 인간의 내적 반성을 거의 담고 있지 않다(김홍중, 2015: 242). 오히려 그의 자서전은 정점에 오른 한 기업인이 자신의 욕망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자신의 삶을 정당화하려는 목적이 강하다. 다시 말해서 정주영의 자서전은 사회학적 객관화를 위한 자료로서는 터무니없을 만큼 가치가 없다. 

물론 두 논문의 저자들은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료를 근거로 객관적인 진리에 접근해가는 실증적 방법 대신 정주영의 자서전에 대해 “해석학적” 접근을 택하거나(김홍중), 아니면 그것을 일종의 문화적 “대본”으로 사용하려는 전략을 취한다(왕혜숙). 이를 위해 두 저자는 각기 다른 이론가들의 사유에 기댄다. 김홍중이 막스 베버(Max Weber)와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를 끌어온다면, 왕혜숙은 악셀 호네트(Axel Honneth)와 제프리 알렉산더(Jeffrey Alexander)를 이용한다. 두 저자의 상이한 선택은 결과적으로 두 논문의 방향을 완전히 갈라놓는다. 김홍중의 글이 한국 자본주의 정신의 근본을 탐색하는 거시적 연구가 된다면, 왕혜숙의 논문은 한 기업인이 자신의 성취를 정당화하기 위해 벌이는 인정투쟁 과정을 추적하는 미시적 관점을 택한다.

먼저 김홍중의 글을 살펴보자. 그는 정주영의 자서전을 통해 “20세기 한국 자본주의의 마음의 구조”를 밝혀내고 비판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김홍중, 2015: 240). 여기서 그가 “마음의 구조”라고 지칭한 것은 최근 그가 주장하고 있는 하나의 이론 틀인 “마음의 사회학”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그에게 ‘마음’은 “사회적 실천들을 발생시키며, 그 실천을 통해 작동하며 그 실천의 효과를 통해 항상적으로 재구성되는, 인지적/정서적/의지적 행위능력의 원천”이다(247). 다소 복잡한 정의이지만 실질적으로 그의 ‘마음’은 피에르 부르디외의 ‘하비투스’ 개념과 상당히 유사하다. 이는 그의 ‘마음’ 개념이 곧바로 부르디외의 ‘자본’ 개념을 끌어오면서 희망과 꿈이라는 다소 일상적인 용어를 매개로 부르디외의 사회적 시간 의식(time consciousness) 이론을 훨씬 적극적으로 적용하는 데서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마음의 사회학”과 정주영은 무슨 관계가 있는가? 김홍중은 정주영의 자서전에 강하게 드러나는 “생존에의 의지”, 즉 삶의 비참함과 좌절,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파우스트 콤플렉스”야 말로 한국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마음의 구조임을 주장한다. 파우스트 콤플렉스(혹은 정주영의 호를 따서 아산심(心))는 괴테의 유명한 작품 『파우스트』에서 끊임없이 욕망하고 열망하는 파우스트가 가진 삶의 에토스(ethos)이다. 이는 곧바로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떠올리게 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베버는 미국적 정신의 화신인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의 예시로 들며 자본주의 정신이 단순한 물질적 탐욕이 아닌 끊임없는 노동을 소명으로 받아들이는 에토스라고 강조한 바 있다. 베버가 프랭클린을 발견했다면, 김홍중은 정주영을 발견한다. 김홍중에게 정주영은 한국 자본주의적 ‘마음’의 화신이다.

이처럼 김홍중은 정주영의 경제적 야망과 실천을 한국 자본주의라는 역사적 맥락에 위치시키고 그 의미를 파악하는 해석학적 접근을 시도했다. 그에게 정주영은 구조의 구속에 무력한 일개 행위자(agent)가 아니라 한국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구조를 뒤흔드는 파우스트적 영웅이다. 반면 왕혜숙은 정주영 또한 발전국가라는 구조적 맥락 하에서 사회적 인정을 받으려고 투쟁했던 한 사람의 행위자였음을 강조한다. 왕혜숙에게 정주영의 자서전은 국민이라는 이름의 청중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 의도적으로 작성된 연극 대본, 즉 “인정투쟁의 수단”이다(왕혜숙, 2016: 43). 

그녀의 논문에서 인용되는 이론가는 호네트와 알렉산더 두 사람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이 논문은 후자가 제창한 “문화사회학의 강한 프로그램”의 응용이라 봐도 무방하다. ‘사회적 공연’이라는 제목에서 암시되듯이, 왕혜숙의 논문은 정주영 자서전을 공연 대본이라고 간주한 뒤, 자서전 속에 담긴 성(聖)과 속(俗)의 이항 코드(binary code)를 분석한다. 왕혜숙은 정주영의 세 개의 자서전 중 1991년 판을 중심으로 분석하는데, 이 판본은 1992년 대통령 선거를 염두에 두고 서술된 일종의 홍보 책자였다는 사실에서 추론을 시작한다. 그녀는 정주영이 자신의 자서전을 통해 거대기업의 총수인 재벌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탈피하고 청중들로부터 진정한 인정을 받길 원했다고 본다. 물론 그 목표가 달성되었느냐는 이 논문의 중심주제가 아니다. 다만 정주영이라는 좀 더 강력한 일상 행위자가 자신에 대한 부정적 반감으로 짜인 구조에 대하여 어떤 대본을 통해 인정투쟁을 벌였는지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정주영의 자서전은 크게 두 가지 갈등 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먼저 기업인과 정치인이라는 이항대립이 있다. 여기서 긍정적인 축은 당연히 기업인이며, 부정적인 축은 정치인이다. 기업가 정주영이 만난 정치인들은 대부분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권력을 이용하는 부패한 집단”이다(왕혜숙, 2016: 55). 반면 기업인인 자신은 단순히 탐욕적인 장사치가 아니라 “도덕적으로 우월한 정체성과 지위를 가진 존재”, 즉 “선비”로서 표상된다(56). 이 영웅 서사에서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는 선비인 기업인 정주영은 민족과 국가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인간으로 탈바꿈한다. 이 과정에서 정주영은 정치인뿐 아니라 무리한 요구를 들이미는 관료집단과도 경쟁하는데, 이러한 시련도 훌륭하게 이겨낸다.

하지만 국익을 위해 헌신하는 이미지를 얻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장벽을 넘어서야 했다. 그것은 바로 정치인만큼이나 타락한 다른 기업인들이다. 이를 위해 정주영 자서전은 두 번째 이항대립을 이용해야 했으며, 여기에서 빌런(villain)은 대우의 김우중으로 대표되는 여타의 타락한 장사꾼들이다. 국익과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는 정주영이 “진정한 자본주의”를 상징한다면, 김우중을 비롯한 악덕 장사꾼들은 앞서의 타락한 정치인, 무능한 관료들과 결탁하여 개인적 부의 증식에만 관심을 두는 “악성 자본주의”의 씨앗들이다. 정치인-관료와의 흥미진진한 대결이 영웅 서사라면, 여타의 타락한 재벌들에 의해 자신의 이미지까지 도매금으로 묶여 망가지는 이 과정은 비극서사이다(왕혜숙, 2016: 65). 

이처럼 정주영의 자서전은 기업인과 정치인(관료), 그리고 청렴한 기업인과 부패한 기업인이라는 두 종류의 이항대립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런데 여기서 왕혜숙은 매우 중요한 논점을 제기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항대립이란 가치의 대립이며, 따라서 어떤 가치가 올바르고 그른지를 판별한 준거가 반드시 요구된다. 그 준거 대상은 성과 속 어느 쪽에도 편파적으로 속하지 않으면서 양자의 대립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초월적인 존재여야 한다. 왕혜숙은 그것이 바로 ‘박정희’라고 주장한다. 잘 알려졌다시피 박정희는 국가경제발전을 위해 기업 활동을 압박했으며, “자유로운 시장경제”를 방해했다. 이런 면에서 박정희는 무리한 요구를 해 오던 정부 관료들을 닮았지만, 동시에 기업인이 국익에 기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다(왕혜숙, 2016: 70-71). 자유로운 기업활동을 요구하는 재벌이 자신을 국가발전을 걱정하는 선비라고 주장할 때, 우리는 독재자이면서도 국가발전을 이뤄냈다 여겨지는 박정희를 손쉽게 떠올릴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왕혜숙은 정주영이 사후적으로 박정희의 모순적인 이미지를 자신에게 투사하려고 했던 게 아니냐는 결론을 내린다(71).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김홍중과 왕혜숙은 정주영 자서전이라는 동일한 텍스트를 서로 다른 방향에서 접근한다. 김홍중에게 정주영은 한국 자본주의 ‘마음’의 화신이며 생존을 지향하는 발전주의를 상징한다. 이런 접근이 다소 추상적이라면, 왕혜숙은 반대로 자서전이라는 ‘텍스트’에서 이항대립을 발견하고 그 근원에서 ‘박정희’라는 구체적인 설계자를 발견한다. 이런 점에서 김홍중이 베버와 부르디외의 사회학을 문학평론처럼 만들었다면, 왕혜숙은 “성과 속의 이항대립”이라는 다분히 문학평론을 연상시키는 이론 틀을 통해 문학평론을 사회학화하고 있다. 사회학을 문학평론으로 바꾸는 작업과 문학평론을 사회학으로 바꾸는 작업 중 어떤 길이 더 매력적인지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그러나 양자는 모두 사회학의 외연과 내포를 넓히고 깊게 하는 유익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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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17-04-13 00:23:59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2017-04-13 03:58:51

그러게요, 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