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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과학 한입] 마이클 부러보이가 사회학과 작업장에 대해 이야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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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17 19:00:10
(번역자) 사회과학의 연구 성과를 대중들에게 소개하는 팟캐스트가 있습니다. Social Science Bites (사회과학 한입, 사회과학 맛보기)라는 팟캐스트인데요, 이름에서 아시다시피 철학 팟캐스트 Philosophy Bites (철학 맛보기)의 자매 팟캐스트입니다. Sage 출판사의 지원을 받고 있고, 영국의 철학자이자 대중 저술가인 데이비드 에드먼즈가 진행하고 있어요. 
15-25분 가량 대담이 진행되고 사회과학을 잘 모르는 일반 대중을 위한 팟캐스트이기 때문에 내용이 어렵지 않습니다. 비록 영어로 진행되지만 스크립트를 준비한 대담이기 때문에 영어를 모어로 하지 않는 사람이 듣기 수월한 편이에요. 여러 번 반복해서 들으면 내용이 이해됩니다. 
영어 공부 겸 듣고 있는데 재미있는 팟캐스트들을 번역해 소개시켜 드리려 합니다. :)
이번에는 미국사회학회 회장을 역임한 마이클 부러보이(Michael Burawoy)의 인터뷰를 올립니다. 아래 링크로 가시면 들을 수 있습니다. (혹은 아이튠즈 팟캐스트에서도 들으실 수 있고요.) 

 



데이비드 에드먼즈: 현재 연구하고 수업하는 사회학자 중 가장 중요한 사람 중 한 명인 마이클 부라보이는 학자로서는 매우 비상(非常)한 삶을 살아 왔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일을 하셨는데, 구리 광산에서부터 가구 공장까지 일을 했고 기계 작동자(machine operator)이자 철강 노동자기도 했습니다. 그의 목표는 죽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노동자들의 행위와 경험을 가까운 거리에서 밀착해 관찰함으로써 이해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이야기할 주제는 사회학과 작업장(workplace)입니다. 연구 주제에 대해 간단히 얘기해주실 수 있나요? 

마이클 부러보이: 네. 산업사회학자로서의 제 경력은, 저는 스스로를 그렇게 부르는데요, 1968년부터 시작됐습니다. 잠비아의 구리 산업을 연구하게 되었는데, 잠비아에서 시카고 남부로 와서 사실 미숙련이지만 공식적으로는 반숙련 기계 작동자(machine operator)로 일을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헝가리에서 철강 노동자로 일을 했습니다. 그 후 러시아로 가서 가구 공장에서 일을 했죠. 그리고, 제가 연구를 하면 보통 일어나고는 하는 일인데, 러시아가 붕괴했습니다. 붕괴 당시에는 소비에트 연방이었으니 그렇게 불러야 하겠네요. 그리고는 10년 혹은 12년 간을 같이 일했던 동료들을 따라 다녔습니다. 

에드먼즈: 한 번에 하나씩 다뤄 봅시다(Let’s take those one at a time). 잠비아 구리 광산에서 무엇을 했죠?

부러보이: 좋은 질문입니다. 68년에서 1972년까지 잠비아에 있었죠. 잠비아 독립 4년 후였고요, 광산 산업의 경영 직종에 일자리를 얻었어요. 그때 구리 산업이 두 개의 거대 다국적 기업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는데 산업이 어떻게 잠비아의 갓 독립한(post-colonial) 정부에 반응하는지 살펴보고자 했었죠. 인사 연구 부(Personnel Research Unit)에 자리잡아서 운이 좋았고, 저는 캠브리지 석사 학위를 갖고 있었습니다. 흑인과 백인의 임금구조를 통합하려는 단일 임금구조의 형성하는 데에 저는 필수적인 기술자였습니다. 은연중에(covertly) 그 문제에 상당히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는데—윤리적이지 않은 프로젝트였다고 말할 수도 있겠죠—그것은 후기식민 상황의 잠비아에서 인종 차별(color bar)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고자 하는 프로젝트였습니다. 독립 이전, 인종 차별은 잠비아는 물론 다른 아프리카 나라의 작업장을 규율하던 규칙이었고 그에 따르면 백인들은 흑인들에게 어떤 지시도 받지 않았죠. 후기 식민 상황의 잠비아 구리 산업에 인종 질서상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이해하고자 했습니다.

에드먼즈: 말하자면 비밀경찰(undercover)처럼 일을 하고 있었던 셈이네요. 공식 학문 연구를 위해 그곳에 있었던 것은 아니죠? 

부라보이: 물론 그렇습니다. 거기에는 기술자 자격으로 일을 했고요. 일을 하며 동료들은 저를 유능하다고 느끼게 됐습니다. 하지만 그 답례로 저는 이 비밀스런 프로젝트(covert project)에 관한 모든 것들을 찾아낼 수 있었죠.

에드먼즈: 책으로 써낸 것이 그것이죠? 

부라보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걸 출판해야 할지 말지 문제가 있었어요. 제 말은 제가 분노했다는 것인데 왜냐면 물론 제 연구 성과가 잠비아의 인종 차별이 유지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인종 차별이 어떤 방식으로 유지됐냐면 잠비아인들이 주재원(expatriate)이나 기존 백인의 포지션으로 승진된다 할 때 왕년의(erstwhile) 백인 종업원들은 새로 만들어진 포지션으로 승진되는 식이었습니다. 그런 방식으로써, 인종 차별을 유지시키던 온갖 조직적인 수법들(organizational manipulations)이 유지되었던 것이죠.
그것이 제가 쓴 것들이고, 저는 이해관계의 관점에서 이것을 설명하고자 했어요. 기업들의 이해관계, 매니저(그때는 백인 매니저였고)들의 이해관계, 후기 식민 상황의 잠비아 정부의 이해관계, 노동자들의 이해관계가 있었죠. 노동자들은 잠비아화(Zambian-ization)이나 잠비아의 새로운 프티부르주아 계급의 형성에 특히 관심이 있진 않았어요. 그들은 노동조건을 개선시키거나 임금을 올리는 데에 관심이 있었죠. 백인 매니저들은 그들의 일자리를 계속 지키고 싶었습니다.
이 모든 상황에서 핵심 행위자는 정부였습니다. 정부는 마치 이런 식이었어요. “긁어 부스럼은 만들지 말고(let sleeping dogs lie), 어쨌든 돈을 벌고 있으니 좋다.” 당시 95%의 해외 세입(foreign revenue)은 구리 산업에서 나왔죠. 정부 사람들은 마치 “그래, 잠비아인들이 승진하는 이상, 인종 차별에 대해 염려할 필요는 없겠군.” 

에드먼즈: 잠비아에서 시카고로 왔을 때는 어떤 일이 있었죠? 시카고는 미국에서 가장 인종분리가 심한 도시 중 하나이기도 한데요. 

부러보이: 네. 음, 저는 박사 학위를 하러 미국에 갔는데 왜냐하면 제가 첫 사회인류학 학위를 받은 잠비아에서 배웠을 때 발전에 관한 사회학 이론은 미국에서 온 것이고 그것은 사실 제가 그렇게 마음에 들어하는 분석틀은 아니었어요. 제가 착수하고 있었던 계급 분석을 사람들은 놓치고 있었죠. 그래서 저는 보수주의적 사회학의 고향인 시카고로 갔습니다. 그런 보수주의 사회학자들로 하여금 그때에 “제3세계”, 지금은 “남부(Global South)”라고 부르는 문제의 속성에 대해 참여시키고자 하는 희망을 품고요.
그런데 제가, 당시의 [시카고 대학의] 새로운 나라들에 대한 위원회(Committee on New Nations)에 접근했을 때, 그 위원회는 막 해산한 직후였죠. 아무도 이제 아프리카에는 관심을 갖지 않게 된 겁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뭐, 그럼 이제 시카고의 뒷마당에서 녀석들을 제압하는 수밖에 없겠군.” 작업 현장(shop floor)의 노동자들의 경험을 마르크스주의적 시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심산으로 남부 시카고 공장에서 반숙련 기계 조작공으로 일자리를 잡았습니다. 

에드먼즈: 그때에는 연구자로서 일을 한다는 것이 명확했죠? 숨기는 것은 없었고, 동료들은 모두 당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았고요.

부러보이: 정확합니다. 경영진과 동료 노동자들에게 말을 했어요. 작업장을 연구하러 왔고, 그들의 경험을 이해하려 왔다고. 그런데 그들은 제가 여기 온 목적에 대해 아주 조금의 관심도 표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저를 말썽꾸러기로 봤습니다. 왜냐면 제가 일에 무능했기 때문에 다른 이들의 목숨에 위협을 가했기 때문입니다. 자칫하면 제가 죽거나 다른 사람들이 죽을 수 있었던 순간도 많았습니다.

에드먼즈: 그곳에서 인종과 계급에 관심이 있었죠? 인종과 계급은 그곳에서 중첩되어 나타났나요?

부러보이: 흥미로운 질문입니다. 다양한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었어요. 제가 노동 현장에 진입하자마자 발견해 낸 것이 있는데 무엇이냐면 여기 사람들은 왜이렇게 일을 열심히 하냐는 겁니다. 그것이 주된 관심이었습니다. 무언가 좋은 이유랄 게 보이지 않았어요. 산업사회학은 당시까지 왜 노동자들이 게으른가, 왜 그들은 생산량을 제한하는가(restrict output)에 대해서만 질문했습니다. 저는 거꾸로 생각했고 사실 노동자들은 매우 열심히 일하고 있었습니다. 왜 그들은 보상을 아주 적게 받음에도 매우 많은 노력을 투여하고 있을까요?
그래서 저는 노동 현장에서 합의(consent)가 조직되는 방식을 이해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이런 노력으로부터 나온 책이 “합의를 제조하다(Manufacturing Consent)”입니다. 저는 항상 교대 근무자였는데 2교대조에서 노동자 절반은 아프리칸-아메리칸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백인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종에 관해 제가 무언가를 주장할 때 사실 노동환경에서 인종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고는 했어요.
노동이 조직되는 방식, 노동 현장에서 정치가 조직되는 방식, 작업장 내부에서 노동 협상이 조직되는 방식은 사실 인종이라는 것을 제쳐두고 개인들을 권리와 의무를 보유한 산업적 시민(industrial citizens)으로 구성하고자 하는 과정이었습니다. 모두들 인종에 관한 농담을 많이 날리곤 했는데, 그 농담의 요점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봐, 인종은 여기서 중요한 게 아니야. 그런데 작업장 바깥에서는 중요하지.” 

에드몬즈: 남부 시카고에서 동부 유럽으로 떠났죠. 거기서는 또 헝가리에 있다가 러시아로 가셨고요! 

부러보이: 그렇습니다. 제가 구상하고 있었던 논증은 특히 노동조합이 강성한 지역에서 후기 자본주의에 특유한 노동의 헤게모니적 조직(hegemonic organization of work)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란 사람들을 열심히 노동하도록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합의를 조직해내는 것이죠. 저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마이클, 당신은 틀렸어. 그것은 자본주의의 기능이 아니라 산업사회의 기능인 것이겠지.” 저는 그 비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이렇게 응수했습니다. “알겠어. 그러면 남부 시카고에서 일어난 일과 비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어난 일들을 비교한다면 알 수 있겠군.” 
당시 연대(Solidarity) 운동이 1980-81년 폴란드에서 일어났고, 많은 사회학자들은 모두 그 노동계급의 운동을 놀라서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transfixed). 폴란드에 가기 위해 폴란드어를 배우기 시작했는데요, 그런데 학자들이란 본래 항상 시대에 뒤처지는 존재들이기 마련이라 공부는 늘어지기만 했고 제가 폴란드에 갈 채비를 마쳤을 때에는 이미 연대 운동이 끝날 즈음이었습니다. 제 친구 중 한 명이 그래서 저에게 “헝가리에 오는 것은 어때?”라고 묻더군요. 그는 5년에서 6년 동안 망명 중이었습니다. “나랑 같이 돌아가는 건 어때?”라고 말한 것이죠.
그래서 저는 헝가리에 갔고 제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열흘 동안이었습니다. 1982년이었죠. 헝가리는 당시 사회주의 국가였고, 사회학자들은 제가 흥미를 가지는 것들과 매우 비슷한 것들에 관심을 가졌죠. 노동시장이나 작업 조직(organization of work) 등이요. 그리고 저는 헝가리가 연구에 아주 좋은 장소일 것이라 느꼈습니다. 그때는 헝가리의 역사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열린 시기였고, 그래서 1988-89년 저는 거기서 몇 개의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우선은 샴페인 공장에서 시작해, 그 후에는 시골 지역의 작은 직물공장에서 일했죠. 1984년 여름 저는 기계 작업장(machine shop)에서 어찌저찌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카고와 헝가리의 기계 작업장을 비교할 수 있었어요.

에드먼즈: 시카고와 유사점이 있었나요?

부러보이: 유사점이 참 많았어요. 놀랍게도 기계장치들이 서로 참 비슷했고 두 나라의 기계 작업장(machine shops)들은 모두 생산 당 단가제(piece rate payment system)에 기반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부 시카고에서 흥미로웠던 점은 그곳에 모종의 고용안전망(employment security)이 있었다는 것이죠. 사람들을 해고하는 것이 쉽지 않았고,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임금에 대한 안전망(income security)이 있었다는 겁니다. 남부 시카고에는 항상 최저임금이 있어서 얼마나 적게 일하든지 간에 보장된 급여가 있었는데 반해 헝가리에서 노동자들은 그저 일한 만큼에 따라 임금을 지급받았지요. 물론 일자리 안전망은 남부 시카고보다 헝가리가 더 나을지 모르겠지만 헝가리에서 임금에 대한 안전망은 확실히 더 불안정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일을 더 열심히 하게 했지요. 그 당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신화는 사회주의 노동자들은 열심히 노동하지 않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는데요, 사실 저는 그런 것을 경험해 보진 않았습니다.

에드먼즈: 그리고 헝가리에서도 역시 철강 산업에서 일하셨죠? 그렇나요? 

부러보이: 맞습니다. 저는 운이 참 좋았어요. 저는 제강소에 취직하기를 바라곤 했습니다. 왜냐하면 헝가리 에게르(Eger)에 위치한 기계 작업장(machine shop)으로 출근할 때 저는 미슈콜츠(Miskolc)라는 지역을 지나쳐야 했는데 그곳은 바로 레닌 철강소(Lenin Steel Works)가 있었던 곳이었습니다. 어찌 됐든, 여러 까다로운 일들이 있었는데 그것을 헤치고 용광로 관리인으로 취직했습니다. 철강업의 핵심이라 할 만한 직종인데요, 저는 항상 이런 일자리를 얻는 것을 꿈꿨습니다. 왜냐하면 철강 노동자야말로 사회주의적 노동자의 원형(prototypical)이라 할 만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발견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철강 노동자들의 의식이 지배 이데올로기와 정반대 방향으로 작업장에 의해 형성되는 과정이었습니다. 국가사회주의의 지배 이데올로기의 주장은 즉 국가사회주의가 평등하고(egalitarian) 정의롭고 효율적이라는 사회를 낳았다는 것이죠. 그런데 노동자들은 그것에 그냥 고개를 젓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회는 부정의하고, 평등하지도 않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주 비효율적이라고.
그래서 그들은 당 국가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와 지역의 대표자들을 제대로 사회주의를 실현하고 있지 않다고 비판하곤 했죠. 즉 거기에는 사회학에서 부르는 “내재적 비판”, 즉 당 국가가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다고 비판하는 게 있었죠. 어떤 의미에서는 국가가 사회주의를 제대로 실현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의식이 사회주의적이었던 것입니다. 

에드먼즈: 이것은 당신이 교대하며 점심을 먹을 때 사람들과 나누던 대화에서 알아챈 것인가요?

부러보이: 대화도 그렇지만, 실천에서도 물론 느꼈지요. 철강소에서 일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 총리가 왔습니다. 총리가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고 저는 10월 혁명 사회주의 여단(October Revolution Socialist Brigade)에 속해 있었어요. 우리 조는 토요일에 교대근무를 했는데 비유하자면 이것은 사회주의에서는 세금 내는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그때의 과업은 철강소를 칠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철강소에 페인트칠을 한다는 게 어이없는 아이디어 아닙니까.
동료들과 일을 하기 시작했는데 저는 새 페인트 붓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동료들은 슬래그 문(slag doors)을 파랗고 노랗게 칠하고 있었는데 말도 안 되는 짓이었죠. 페인트 붓 하나를 잡고 나서 검은 페인트 통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냥 삽을 칠했습니다. 삽은 용광로 관리인에게 매우 중요한 작업 도구죠. 저는 그걸 검게 칠한 겁니다. 그러자 관리인이 와서, “대체 뭘 하는 거야 미쉬?”라고 물었습니다. “으음, 저는 지금 사회주의를 건설하려고 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모두 폭소를 터뜨렸죠. 
10월 혁명 사회주의 여단이 가진 위트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미쉬, 미쉬, 너는 지금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게 아냐. 그게 아니라 너는 사회주의를 페인트칠하고 있는 거고 사회주의에 검은 칠을 하고 있구만.” 사회주의를 페인트칠한다는 이 생각은 사람들이 그냥 말하곤 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실천 속에 존재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가정된 종류의 사회주의가 현실에 존재하는 극락인 체하는 집단적 의례를 다들 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러는 동시에 노동자들은 이것이 우스꽝스러운 가면극이라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에드먼즈: 여정의 끝은 러시아, 당시 소련이었고요. 

부러보이: 네. 저는 헝가리에 1988년에서 89년까지 있었고 점차로 사회주의가 종말을 고하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finally it dawned on me that this is coming to an end). 이 종언이 국가사회주의로부터 민주사회주의로의 이행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던 순간이 있었는데요, 그것은 연대(Solidarity) 운동이 그려왔던 것이기도 했습니다. 이 가능성의 희망은 잠깐 반짝이다 사라져 버렸고 이행은 국가사회주의로부터 어떤 형태의 자본주의로 확실히 진행되고 있었죠. 저는 그 이행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러시아로 옮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에는 소련이 아직 존재했고 지금이 아니라면 저는 더는 노동 현장에서 일할 수 없겠다고 느꼈습니다. 1991년 초였죠. 1991년 8월 즈음, 실패한 반-쿠데타가 있었습니다. 옐친이 탱크에 올랐고, 그리고 1991년의 말 소련은 사라졌죠. 
그런데 그 6, 7개월 간 저는 모스크바의 고무 공장에서 무엇보다도 소련의 구질서와 계획경제를 대표하는 이들과, 소련으로부터의 러시아 독립과 시장경제를 대표하는 치기 어린 젊은이들 사이 내전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을 근거리에서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살면서 이런 것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경영 부서에서 매일매일 전쟁이 일어났고 모든 노동자들이 여기에 참전했습니다. 이후 저는 북쪽으로 이동해 코미 공화국(the Republic of Komi) 근처 북극권(Arctic Circle)의 가구 공장에서 반숙련 기계 작동자로 일했습니다. 거기서 저는 진정한 사회주의적 작업장을 목도했습니다. 헝가리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효율적인 셈이었어요. 저는 사실 남부 시카고의 공장보다 헝가리 공장이 더 효율적이었다고 종종 주장하곤 합니다. 그런데 러시아에서는 완전히 사정이 달랐던 거죠. 결핍(the shortages)이 굉장히 극심했어요. 결핍이 상당하다는 것은 그곳에 노력영웅(shock work)이 많았음을 의미합니다. 한 달의 상당 부분에는 일감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사흘이나 나흘, 일하지 않은 시간을 벌충할 만큼의 일을 해야 하는 것이죠. 

에드먼즈: 정말 놀라운 경력입니다. 여러 작업장에서의 경험담 역시 굉장히 흥미롭습니다. 그런 작업장에 갈 때 중립적인 시각을 가지고 일터를 바라보시지는 않을 텐데요.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작업장에서 일하시지 않나요? 저는 그런 시각이 당신께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아닌지 궁금합니다. 

부러보이: 저는 확실히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있고, 이것은 저의 관찰에 영향을 끼치죠. 그런데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을 가진다는 것이 꼭 제가 실제 무엇을 보는지에 필연적으로 영향을 끼치진 않습니다. 일해 왔던 모든 작업장에서 저는 자주 놀라움에 빠지곤 합니다. 저는 남부 시카고에서 사람들이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 것을 발견할지 전혀 상상도 못했습니다. 잠비아에서 인종차별이 재생산될 줄도 물론 예상하지 못했고요. 헝가리의 작업장이 효율적인 작업장일 것이라고는 분명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물론 특정 관점을 가지고 있고 그 관점에 따라 기대와 예상을 합니다. 그러나 매우 많은 경우 그러한 예상들은 무너지게 되고 저는 이론을 다시 구성해내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작업장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이론이 그것이 실재와 충돌하는 것으로 드러나고 분석틀에 도전을 제기하는 이상 사례(anomalies)들을 마주쳤을 때 발전해 온 과정입니다. 

에드먼즈: 그런데 그러다보면 그 분석틀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게 되지 않나요? 

부러보이: 참 재밌는 질문이네요. 제가 가진 마르크스주의적 분석틀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도전은, 소련이 붕괴한 러시아에서의 경험이었는데요. 그때 저는 1990년대 러시아의 엄청난 불황 시기에 실직한 제 동료들을 추적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러시아에는 일자리가 없었어요. 그래서, 생산관계에 기반을 둔 제가 발전시킨 마르스크주의 관점은 사실 상황이 돌아가는 바에 대해 충분한 통찰을 제공해 주지는 못했습니다.
소련 붕괴 이후의 러시아의 동학(dynamics)는 실제로는 시장과 시장 관계, 교환 관계를 따라 움직였습니다. 생산 관계가 아니라요. 그래서 저는 제 분석틀을 수정해야만 했고, 그 지점에서 저는 생산보다는 상품화 과정에 초점을 맞춘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에 굉장히 매혹되었습니다(entranced). 

에드먼즈: 당신의 프로젝트에 대해, 너무 거창한 단어가 아니라면 그렇게 얘기하고 싶은데요(if that’s not too grand a word for it), 그것이 본질적으로 기술적인(descriptive) 것이라 보시나요 아니면 규범적 의제를 갖고 있나요? 노동자들을 위해 무언가 개선하고 바꾸고 싶은 것이 있나요?

부러보이: 네. 의심의 여지 없이 그렇습니다. 제가 가진 마르크스주의적 분석틀은 노동자들이 가진 착취의 경험에 관심을 가집니다. 여기서 착취는 노동에 의한 생산물이 노동자들로부터 빼앗겨 전유된다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이해입니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생계 유지를 위한 임금만을 받기도 하고, 가끔은 그보다도 없거나 어떤 임금도 받지 못하곤 하고요. 

러시아에서 노동자들은 일을 하고 있었고 거기에 보상을 전혀 받지 못했습니다. 규범적 틀 없이 사회학을 할 수는 없지요. 우리가 이론적 틀, 그것이 뒤르켐주의자든 베버주의자든 마르크스주의자든 간에, 그것을 갖도록 추동하는 것은 바로 규범적 틀입니다. 

에드먼즈: 그럼에도 선생님은 활동가는 아니시죠. 그렇다면 선생님의 작업이 선생님이 희망하는 변화를 어떻게 촉진할 수 있을까요?

부러보이: 물론 저는 활동가가 아니죠. 확실히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남부 시카고에서 저는 사회학을 대체할 수 있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만들고자 했어요. 당시 아카데미아에서 재부흥을 겪은 사회학 분과 내 마르크스주의는 주류 사회학을 대체하려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과거를 돌아보면 저는 우리가 참 대단한 전진(make a amazing headway)을 이룬 것 같아요. 하지만 그 발상 자체는 매우 순진했죠. 주류 사회학을 대체하겠다는 그 발상은 어쨌든 나름대로의 결과를 냈었을 것입니다.

에드먼즈: 작업장 내에서 완전히 자신을 몰입시킨(you’ve totally immersed yourself) 선생님의 사례는 매우 이례적입니다. 분명히 동료 노동자들이 당신을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당신이 작업장에서 무언가를 관찰하고 있다는 사실이 기타 노동자들의 행위의 본질을 바꾸었나요? 

부러보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은 “완전한 몰입”이라고 불렀는데 제가 에스노그라피를 수행한 방식은… 완전한 몰입이었지만, 상당히 개입주의적인 방식으로 참여를 하고자(quite an interventionist mode of engagement)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작업장으로 들어가, 실제로 혼란을 일으키고자 했습니다.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작은 것들요. 
제가 남부 시카고에 있을 때 저는 작업장의 사람들에게 이렇게 묻고는 했어요. “왜 이리 열심히 일해요?” 그렇게 물으면 사람들은 굉장히 화를 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본인들이 열심히 일을 한다고 생각하지를 않거든요. 이것은 경영진의(on the part of management) 굉장히 교묘한 술수인데요. 그렇게 그들이 짜증내면 매우 흥미로운 대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헝가리에서도 비슷하게 제가 이방인이라는 사실 자체가 동료들을 자극하는 요소였는데, 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실제로 작업장이 굴러가는 방식을 만들거나 바꾸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작업장 현장은 상당히 완고하여(obduracy) 제가 개입한다 해도 쉽사리 움직이지 않습니다. 저는 작업장을 연구하며 무언가 변화를 시도하고자 하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일으킨 혼란들은 특성상 매우 사소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관찰하고자 했던 과정들의 이해에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죠. 당신이 사회 시스템을 묶어놓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그것을 살짝 뒤흔들어 보아야 합니다. 

에드먼즈: 선생님은 당신의 작업을 에스노그라퍼나 인류학자처럼 묘사하는 것 같은데, 스스로를 사회학자라고 부르시지 않습니까? 스스로를 어느 정도 간학제적이라고 생각하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부러보이: 제가 사회학자이자 인류학자로 훈련을 받았을 때 항상 연구를 할 때 에스노그라피적 접근을 하고자 했습니다. 각자의 시공간에 존재하는 사람들을 연구하고자 할 때 저는 다른 학문의 성과를 끌어오는 데에 개방적인 편입니다. 인류학이 됐든 인문지리학이 됐든 경제학이 됐든 저는 간학제적 접근을 항상 합니다. 
그러나 저는 사회학적 쇼비니스트(a sociological chauvinist)입니다. 학제로서 사회학이 가지는 특수성에 신뢰를 보냅니다. 저는 이것이 특히 이 시대에 중요하다고 보는데, 저는 이 시대를 ‘제3차 시장화’의 시대라고 부르는데요, 다른 사람들은 신자유주의라고 부르지만, 이 시대는 국가와 시장이 연합해 시민사회, 시장이나 국가에 속하지 않는 시민사회의 제도(institutions)와 조직들, 사회 운동에 대해 적대하는 때입니다. 저는 사회학자의 입장이란 정확히 시민사회의 입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물론 경제를 연구하지요. 국가도 연구하지요. 그런데 경제와 국가가 시민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의 입장에서 그것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학은 경제학과 매우 다르죠. 경제학은 시장을 촉진하는 데에 이해가 걸려 있으니까요. 정치적 질서를 촉진하는 데에 이해가 걸려 있는 정치학과도 다릅니다. 중요한 점 하나를 이야기하겠습니다. 저는 주류와 불화하는 경제학자와 정치학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들 학문의 주류적 성격에 도전하는 매우 중요한 인물들이죠. 하지만 사회학의 중심적 특징은 시장과 국가의 도 넘음(overextension)에 도전하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사회학은 오늘날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에드먼즈: 확실히 당신의 작업이 갈 수 있는 영역은 그곳이겠군요. 산업 노동자 계급을 연구해 오셨으니까요. 발전된 국가들에서 산업 노동자 계급은, 멸종한 종은 아니더라도 사멸 위기에 처한 종이긴 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작업은 과거의 유물이 아닌가 싶은데요. 

부러보이: 물론입니다. 제 작업은 지나간 과거 속에서 행해졌습니다. 친구들은 제가 이미 사라진 것이 명백한 산업들로 옮겨다니는 것을 보고 웃곤 했어요. 그러나 제가 발전시킨 많은 아이디어와 원리들(principles), 산업을 연구할 때 쓰이는 방법론들은 현대의 작업장에도 적용 가능합니다. 예컨대 작업장을 연구할 때 노동과정을 생산과정의 집합으로만 바라볼 게 아니라 작업장을 정치가 이루어지는 장소로, 즉 관계들이 조율되고 규제되는 장소로 봐야 한다는 아이디어 말입니다. 작업장에서의 관계들은 때때로 강압적으로 규제되기도 하고, 때로는 합의를 조직하는 방식으로 규제됩니다. 그리고 작업장을 에스노그라피 방법을 사용해, 그러니까 사람들과 함께 있는 방법을 사용해 연구한다는 아이디어는 역시 현대의 작업장에서도 행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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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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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17 22:56:37
영어로 된 팟캐스트라 접근하기 어려웠는데 이렇게 번역해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내용도 참 좋은 것 같습니다 :)

W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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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17 23:22:51

다음에는 스티븐 룩스가 뒤르켐에 대해 이야기한 것을 옮길까 싶습니다 ^^ 특히 사회학과 처음 입학하신 분들이 듣고 읽기 좋은 내용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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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18 10:38:44

오~~ 좋은 글로 게시판 활성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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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18 16:31:29

오랜만에 재밌게 읽었습니다.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