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란도란
‘눈뜨면 없어라’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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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8-03-04 15:13:02

그때가 벌써 언제였을까.

15년전.. 그녀와 내가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했을 때, 그녀는

고교 3학년생이었고, 나는 막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엉터리

대학생이었다.



내가 대학신문에 쓴 라는 짧은 글을 그녀가 우연히

보고 호감을 가진 것이 발단이었다. 외동딸의 성화에 못이긴

그녀의 부모가 나를 찾아서 그녀에게 소개해 주었다.



그녀가 교복을 벗고 바야흐로 대학생이 된 봄날, 신촌 근처의

찻집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영미계통의 시를 열심히 공부해

서 실력 있는 대학교수가 되고 싶다고 했었다. 그리곤 내게 무

엇이 되고 싶으냐고 물었다. 그 시절의 나는 정말이지 대답할

거리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하고 싶은 일이 하나도 없단 말이

에요? 하고 그녀가 재차 물었다





'내 소원은 그냥 놀고 먹는 거야. 막 어질러놓고 아무렇게나

사는거야.'





나는 매우 정직하게 말했다 그녀는 그때 쿡쿡 웃었는데, 몇 년

이 지난 어느 날엔가 그 일을 떠올리면서 내게 말했다.





'사실은 그때 너무 놀랐어요. 세상에 놀고 먹는게 소원인 사람

이 있다니...'





는 내게 꽃다운 그녀를 만나게 해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무서운 사람들과도 만나야 하게 만들었다. 군의

기밀을 누설하고 국군의 사기를 저하시켰다는 혐의로, 나는

모 기관에 끌려가서 심하게 야단을 맞았고, 그 일은 내가 그녀

와 함께 해외로 나가게 만든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그녀와 나는 부부가 되어서 미국으로 날았갔다. 젖과 꿀이 흐

르는 땅을 찾아 떠난 것이 아니라, 유황의 불길을 겁내며 달아

난 셈이기도 했다.



미국에서의 첫 해, 나는 보통 하루에 열여섯 시간씩 막일을 하

면서 학교를 기웃거리기도 했고, 그녀도 옷가게 등에서 일하

면서 울며불면서 이를 악다물고 학교에 다녔다.



미주 기자로 일하면서부터, 나는 내 속에 잠재돼

있는 어떤 속된 야망을 만나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

는 놀고 먹는 게 꿈이었는데, 나는 시뻘겋게 충혈된 눈을 하

고 사는 삶들을 비웃고 싶었는데, 절대로 그게 아니었다. 나

는 그야말로 억척으로 일했다. 남에게 지고는 잠을 잘 수가 없

었다. 충성스럽게 일하고 뛰며, 기사며 칼럼을 써 제꼈다. 칭

송을 구하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은 유치한 허영이 그즈음

의 나를 온통 지배했는지도 모른다. 그건 어쩌면 그녀에게 져

서는 안 된다는 조바심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미국에서의 첫 두 해 동안에 이룬 일은, 우리의 아들

을 낳은 일과 영문학 석사를 딴 일이었다. 이어 법과 대학원에

서 박사를 마치면서 변호사 자격시험을 통과하고 변호사가 되

었다.



미국에 온 지 다섯 해 만이었다.



나는 그때 의 샌프란시스코 지사장이 돼 있었다.

옆자리의 동료들이 눈치를 주는 것 따위는 아랑곳없이, 아주

게걸스럽게 일한 결과였다.





결혼 생활 5년 동안, 우리가 함께 지낸 시간은 그 절반쯤이었

을 것이다. 그 절반의 절반 이상의 밤을, 나나 그녀 가운에 하

나 혹은 둘 다 밤을 새워 일하거나 공부를 해야 했다. 우리는

성공을 위해서 참으로 열심히 살았다. 모든 기쁨과 쾌락을 일

단 유보해 두고, 그것들은 나중에 더 크게 왕창 한꺼번에 누리

기로 하고, 우리는 주말 여행이나 영화구경이나 댄스파티나

쇼핑이나 피크닉을 극도로 절제했다. 그즈음의 그녀가 간혹

내게 말했었다.





'당신은 마치 행복해질까봐 겁내는 사람 같아요.'





그녀는 또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다섯 살 때였나봐요. 어느 날 동네에서 놀고 있는데 피아노

를 실은 트럭이 와서 우리집 앞에 서는 거예요. 난 지금도 그

때의 흥분을 잊을 수가 없어요. 우리 아빠가 바로 그 시절을

놓치고 몇 년 뒤에 피아노 백 대를 사줬다고 해도 나한테 내

게 그런 감격을 느끼게 만들지는 못했을 거예요.'





서울의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내게 이런 편지를 보내시곤 했

다. 한길아, 어떤 때의 시련은 큰 그릇을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 시련이란 보통의 그릇을 찌그러뜨려 놓기가 일쑤

란다.'



애니웨이, 미국생활 5년 만에 그녀는 변호사가 되었고 나는 신

문사의 지사장이 되었다. 현재의 교포사회에서는 젊은 부부

의 성공사례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방 하나짜리 셋집에서 벗

어나,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3층짜리 새 집을 지어

이사한 한달 뒤에. 그녀와 나는 결혼생활의 실패를 공식적으

로 인정해야만 했다. 바꾸어 말하자면, 이혼에 성공했다.





그때 그때의 작은 기쁨과 값싼 행복을 무시해버린 대가로.






김한길의 눈뜨면 없어라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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